시사/역사

레알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 왜 치열한가? 엘클라시코에 대한 모든 것

노루아부지 2023. 3. 5. 23:18

엘 클라시코란?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불리는 엘 클라시코는 스페인 최고의 명문 축구 클럽이자 세계적으로도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두 팀인 레알 마드리드 CFFC 바르셀로나의 더비 매치를 뜻합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치열한 더비이자, 가장 시청률이 높은 축구 경기 중 하나입니다.

어느 정도로 라이벌 의식이 심한지 리그 1위를 하고 있어도 엘클라시코에서 지면 감독의 자리가 위험할 정도입니다.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는 명실상부 축구 역사상 최고의 명문 클럽입니다. 라리가 최다 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최다 우승, FIFA 클럽 월드컵 최다 우승, 공식 국제 대회 세계 최다 우승, UEFA 클럽 랭킹 최다 1위, FIFA 20세기 최고 클럽 선정 등 수많은 타이틀을 앞세워, 클럽 위의 클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한 유일한 팀이자, UEFA 챔피언스 리그 3연패를 달성한 유일한 팀입니다. 

 

 

FC 바르셀로나

FC 바르셀로나

축구역사상 최초의 6관왕, 최초의 두 번의 트레블 달성으로 유명한 FC 바르셀로나는 사실상 GOAT 논란을 종결시킨 메시와 한국에서는 '세 얼간이'로 유명한 사비, 이니에스타, 부츠케츠로 유명한 팀입니다.

 

 

 

엘클라시코는 왜 치열한가?

레알 마드리드 CF는 카스티야의 자부심이고, FC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를 대변하는 클럽입니다.

엘클라시코가 왜 치열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1930년대를 강타한 스페인 내전의 승리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독재자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투표 따위의 위선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얻지 않았다. 총칼과 동지들의 피로써 정권을 얻어냈다.

 

이후 그가 세운 스페인국이 내세운 국가주의의 가장 참혹한 피해자가 된 곳은 카탈루냐 지방입니다.

그와 동시에 바르셀로나는 반프랑코주의와 카탈루냐 독립파를 대변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다음은 프랑코 시절 바르셀로나의 피해 내용입니다.

  • FC 바르셀로나에서 CF 바르셀로나로 강제 개명
  • 1943 코파델레이 준결승전 1차전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대패하자, 바르셀로나 라커룸에 들어온 정부 고위관료들의 협박과 노골적인 승부조작의 결과로 2차전 레알마드리드의 11:1 승리

 

그렇다면 왜 카탈루냐 지방은 피해자가 되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약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스페인의 역사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살던 다른 왕국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북쪽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국토 회복 운동은 레콩키스타가 시작되게 되었는데요. 이때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왕국, 카탈루냐 군주국 등이 이 이베리아 반도 북쪽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11세기 경 이베리아 반도

 

그러던 중, 아라곤 왕국의 여왕과 카탈루냐 군주국의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바란게 4세가 결혼을 하고 또 발렌시아 왕국 등 여러 왕국들이 서로 연합하면서 아라곤 연합왕국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15세기 경 이베리아 반도

 

레콩키스타

그리고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가 결혼을 하면서 두 나라가 합쳐지게 되었고 수백 년간 이슬람 세력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1492년에 마침내 그라나다 왕국까지 정복하며 레콩키스타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왕국 왕들의 결혼으로 두 왕국이 합쳐졌다고는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아라곤 연합왕국의 실세인 카탈루냐 왕국 또한 카스티야 왕국의 간섭 없이 카탈루냐만 따로 정치적으로 분리가 되어있었습니다.

 

카를 5세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고 식민지 개척이 활발해지며 카스티야 왕국은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고 지중해 무역을 주로 하던 카탈루냐는 점점 힘이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은 다른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외국인이라는 느낌이 강했던 카를 5세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왕이 되면서 카탈루냐를 포함한 스페인 각지에서는 카를 5세를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카를 5세는 반란군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을 감행했고 수많은 카탈루냐 인들을 무참히 실해했으며 카탈루냐를 카스티야 왕국의 일개 지방이나 지역 정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완전한 합병

이후에 1635년 프랑스와 스페인 전쟁에서 카탈루냐는 프랑스 편을 들었을 정도로 독립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역시 카탈루냐의 반란군은 스페인 정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펠리페 5세는 카탈루냐의 전통 법 체제와 의회를 폐지해 버렸고 카탈루냐어의 사용도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급격한 경제발전

이후 스페인 제국으로 통합이 된 카탈루냐는 식민지 무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어 19세기 이후에는 경제적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카탈루냐 인들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카탈루냐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카탈루냐 공화국

이후 스페인 제국이 점점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면서 카탈루냐는 결국 자치 정부의 설립을 허가받게 되었고 카탈루냐 공화국의 설립을 선언했습니다.

 

스페인 내전

그러다 두 개의 스페인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아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으로 권력을 잡은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카탈루냐를 포함한 스페인 모든 지역을 잔인하게 탄압했는데요. 그는 카탈루냐의 자치 정부를 없애고 카탈루냐기와 카탈루냐어의 사용까지 금지시켰습니다. 또한 FC 바르셀로나를 스페인어 식의 표기인 CF 바르셀로나로 바꿔버렸고 FC 바르셀로나 로고 속 카탈루냐기도 없앴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승부 조작도 이때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사이가 더욱 틀어져버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치정부 설립과 독립

하지만 프랑코가 죽고 난 뒤 카탈루냐는 다시 자치권을 되찾아 자치 정부를 설립했고 2014년에는 카탈루냐 독립에 대한 주민투표를 했지만 스페인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17년 9월에는 카탈루냐 주의회에서 주민 투표법이 강행 통과되면서 같은 해 10월 1일 분리 독립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10월 27일 카탈루냐 의회에서는 독립 선포안 투표에 따라 카탈루냐 독립을 선포하며 카탈루냐 공화국이 건국되었지만 스페인 정부는 격하게 반발하며 투표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역사상 카탈루냐 공화국은 총 4번이 생겼지만 길게는 일주일 정도, 짧게는 9시간 만에 망해버렸고 2017년에 건국된 카탈루냐 공화국 역시 4일 만에 망해버렸습니다.

현재까지도 카탈루냐는 독립을 외치고 있습니다.

 

 

결론

독립을 반대하는 스페인 측의 레알 마드리드와 독립을 원하는 카탈루냐 측의 FC 바르셀로나가 축구경기를 할 때면 서로 간의 앙금이 축구 경기에 표출되어 선수도 관중도 격렬해지는 경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엘클라시코에서 느껴지는 지역감정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프랑코의 정치질로 인해서 생긴 것이고 실제로는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 왕가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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